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 인민지원군 (문단 편집) ===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중공군 (1950.11.25~12.24) === 중공군은 1차 작전을 마친후 일단 산악지역에 매복하고 있었는데, 맥아더는 아직까지도 중공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며, 압록강까지 단숨에 쳐올라갈 대공세를 기획했고, "일이 빨리 풀리면, 우리 아그들 일부는 크리스마스까지 집에 돌아올 수 있음."--마켓가든?--[* 원문 Well, if they go fast enough, maybe some of them can be home by Christmas.]이라고 워싱턴에 호언장담을 했다. 미군의 각 부대에는 일본 도쿄 긴자의 쇼핑 전단지까지 배포될 정도였다. 이 대공세의 이름은 이런 호언장담에서 이름을 따서 크리스마스 귀향 공세(Home-by-Christmas Offensive)라고 이름이 붙었다. 11월 24일, 서부전선의 [[청천강 전투]]에서는 [[월튼 워커]] 중장이 지휘하는 유엔군(미8군과 한국군, 터키군 포함)이 25만 병력으로 청천강 유역에서 공세를 시작했으나, 최소 약 30만 명의 병력을 가진 중공군은 반격에 나섰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국군을 대상으로 집중공세[* [[인해전술]]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를 펴서 전선에 유엔군의 돌파구를 뚫었고, 미8군은 포위당하지 않기 위해 후퇴하여야만 했다. 이 후퇴는 결국 서울을 내주는 1.4후퇴까지 이어지며, 미군 역사 상 가장 긴 거리를 후퇴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동부전선의 [[장진호 전투]]에서는 [[쑹스룬]]이 지휘하는 6개사단, 총병력 15만의 중공군이 미10군단이 주축인 10여만 명의 유엔군을 포위했다. 송스룬군은 3,000여 명의 병력을 가진 선견대[* 원래는 맥린 부대(Task Force MacLean)라고 이름이 붙었는데 부대장 맥린 대령이 부상 후 포로가 되자(곧 전사) 후임인 페이스 중령이 지휘권을 인수했고, 이름을 페이스 부대라고 했다.]를 분쇄하고, 약 1만 명의 병력을 가진 미해병1사단을 완전히 포위 섬멸하려 했으나, 미해병1사단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에 큰 피해를 입히며 지연작전을 실시, 동해안의 흥남방면으로 탈출한 후, 그 곳에서 선편으로 피난민들과 함께 남쪽으로 철수했다. 이때 전선에서 활약한 중공군은 대부분 경보병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화력이래야 [[박격포]]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리하여 포병이나 공중지원은 거의 받지 못했지만, 자동차의 기동이 어려운 산악지형에서 보병의 기동력을 십분 활용한 포위전술에 매우 능한 모습을 보였다. 가장 즐겨 사용한 전법은 V자 전법으로 적이 V자의 한 가운데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깊숙히 들어왔을 때 보병의 재빠른 기동으로 양 다리를 닫아 포위망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매복과 위장을 철저히 실시하여, 유엔군은 공중정찰로도 이렇게 포진한 중공군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간에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야간에 숨어있던 이들이 뛰쳐나와 공세로 나오며 포위되기 일쑤였다. 일단 이들은 포위된 적을 대병력을 동원하여 어떻게든 섬멸했기 때문에, 엄연한 포위전술이며, 포위된 적을 섬멸하기 위해 적보다 압도적인 수의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전술교리상 당연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중공군은 이 대공세로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를 좌절시키고 미군을 후퇴시켰지만 미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서 희생을 감수하는 대담한 작전을 폈기 때문에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전투로 인한 병력의 손실 뿐만 아니라 영하 30~40도로 내려가는 북한의 산악지역에서 하루에 수십킬로미터를 도보로 행군시키는 초인간적인 작전을 펴면서 생긴 동상, 질병 등의 비전투인원의 손실도 극심하여 공세가 끝난 후에는 전 병력의 40%가 작전불능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백선엽]] 장군의 전후 회고록을 보면, 이 당시 중공군의 보급사정은 매우 열악하여, 중공군 사병의 식량은 그저 감자 몇 덩이, 실탄도 몇 발 휴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포로를 후송할 준비도 안 되어있었는지, 몇몇 중공군 부대는 잡은 유엔군 포로들을 무장해제 이후에 현장에서 즉시 석방할 정도였다.[* 북한 인민군 같은 경우는 후송이 어려워졌을 때 포로를 처형한 경우가 여럿 있었지만, 중공군의 경우는 1920년대 초창기부터 마오쩌둥의 군율상으로는 포로 학대를 금지시켰었다. 물론 현실은 [[바탄 죽음의 행진|식량을 아예 배급하지 않거나]], [[말메디 학살|낄낄거리면서 포로를 쏴 죽이거나]], 부상당한 포로를 산채로 태워죽이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참조바람.] 중공군과 인민군은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에 반격을 취한지 겨우 열흘만인 12월 6일 평양을 탈환하고 더욱 남진하여, 12월말에는 38선을 지나던 [[개성시|개성]]까지 이르렀다. 이로서 북진통일의 가능성이 높던 전쟁은 다시 원점으로 회귀했다. 여기에 12월 23일 [[월튼 워커]] 중장이 의정부 부근에서 사고사했으며, 후임자로 [[매튜 리지웨이]] 중장이 8군 사령관에 취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